조각글 3

최종 수정일: | #글쓰기

 “그래, 날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가 뭐지?”

 운터는 마플을 바라보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표정과 행동에는 귀찮음이 확실히 배어 있었다.

 ‘하긴 운터가 가장 바쁘다는 시간—티 타임—에 불러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 생각을 한 체 마플은 운터를 탁자 앞으로 안내한 후, 살짝 삐걱거리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서 앉지. 내가 준비해 놓은 차 다 식을까. 빨리 먹어.”

 마플은 찻잔을 들면서 운터에게 건네는 시늉을 했다.

 “…와…”

 운터는 외마디 말을 내뱉었다.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티 타임 중간에 불러냈으니 뭔가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했지만 그것이 약간의 접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운터는 미묘한 표정을 지은 뒤 마플의 맞은 편 자리에 있는 의자를 잡아당겨 빼냈다. 의자 다리는 나무 바닥과 마찰하며 듣기 거북한 소리를 냈다.

 ‘걸려들었어.’

 이건 마플이 준비한 계획 일부였다. —운터를 티 타임 중에 불러내서 차 대접을 하면 될 거다—라는 완벽한 계획. 마플은 자신의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어 가는 상황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의자에 앉기 전 그 모습을 응시하던 운터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그저 한심하다고나 할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 운터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마플은 운터의 이 감정을 읽지 못했다. 푹신한 의자의 쿠션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니 마플의 눈과 운터의 눈이 마주쳤다.

 적막만 흐르는 몇 초. 마플에게는 그 몇 초가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운터는 왜 차를 먹지 않는 걸까.’

 잠깐 고민해 보았지만 저 운터의 표정을 보니 딱히 의심할 거리는 없어 보였다. 마플이 대화를 시작하려고 한 순간, 운터가 먼저 대화를 시도해 왔다.

 “먼저 드시죠.”

 ‘먼저 먹으라고? 나보고?’

 마플은 적잖이 당황했다. 운터가 먼저 먹어야 내 계획이 완벽하게 돌아가는데. 톱니바퀴가 하나씩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눈빛을 보고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운터가 몇 모금이라도 먹기만 한다면 내 계획은 성공이니까. 잠시 후 운터가 덧붙였다.

 “원래 대접받는 사람이 먼저 먹는 게 원칙이지만, 뭐, 제 허락이 떨어졌다면 괜찮겠죠. 마플님이야말로 식기 전에 드세요.”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아… 그럼 내가 먼저 먹겠네.”

 마플은 찻잔에 달린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 세 개를 손잡이에 넣은 후 찻잔을 드니 쉽게 들어 올려졌다. 다른 손으로 찻잔의 한쪽 면을 받친 채 입술을 잔의 가장자리에 가져다 댔다. 잔의 내용물이 조금씩, 조금씩 입속으로 들어갔다.

 ‘훗…’

 운터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마플은 차를 몇 모금 마시다가 잠시 내려놓았다. 마플은 운터가 왜 아직도 차를 마시지 않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운터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운터, 아직 차 안 마셨네?”

 “아, 네. 마플님이 다 드신 다음에 마셔야죠. 그게 도리니까.”

 그러고서는 살짝 찻잔을 드는 시늉을 했다. 방금 잠깐 본 표정이 신경 쓰였지만 마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잔을 들어올렸다. 남은 차가 입안으로 들어왔고 바로 그때.

 “우욱!”

 마플의 목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심해졌고 마신 차를 미처 삼키지도 못한 시점, 마플은 기침을 하면서 입에 있던 차를 뱉어냈다. 잠시 손을 입으로 닦고 테이블에 남은 자국을 보는 순간 마플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에 검붉은 자국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 자국은 누가 봐도 분명 피였다. 마플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고선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 보았다. 그래도 테이블의 검붉은 자국은 변함이 없었다.

 “잘 가라. 마플. 너의 마지막 홍차를 즐겨라.”

 운터는 속삭였다, 마치 장례식에서 조문하듯이. 그러고서는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기 시작했다.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천천히 열고, 뒤를 바라보니 마플이 테이블 위에 상체를 겨우 가눈 채 운터에게로 손을 뻗고 있었다.

 “제발… 쿨럭쿨럭!”

 마플은 다시 한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과 달리 한 번 시작된 기침은 멈출 수가 없었고, 마플은 자신의 머리카락 색처럼 시뻘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테이블과 바닥은 금세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운터는 그 광경을 보지 않으려는 듯 잠시 고개를 가로저은 후 열린 문의 틈새로 나가기 시작했다. 문을 닫으니 마플의 기침 소리와 목소리가 점점 옅어져 갔다.

 운터는 방금 닫은 문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선 생각했다.

 ‘내가 당할 뻔했어. 먼저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fin

댓글 없음